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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컨설팅

박수칠 때 떠나라

by Jinny815 2013. 7. 9.



[동아비즈니스리뷰 132호 ]

마이클 아이스너는 1984년 디즈니의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됐다. 당시 디즈니는 창의성이 고갈된 상태였고 작품도 3∼5년에 한 편 정도만 만들 정도로 효율성이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특별한 히트 작품도 내지 못해 과거의 성공에 기대어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

 

디즈니의 새로운 수장이 된 아이스너는 극장용 만화영화에만 치중했던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그는 가정용 시장, 즉 홈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성장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회사 중역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까지 극장에서 상영했던 만화영화들을 비디오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아이스너의 전략은 적중했다. 불과 몇 년 만에 디즈니의 수익 대부분이 가정용으로 판매되는 비디오와 DVD에서 나왔다. 아이스너는 사업 다각화를 위해 1995년 또 한 번의 중대한 결정을 했다. 미국 3대 방송사 중 하나인 ABC를 190억 달러에 인수한 것이다. 이 인수 과정에서 미국의 대표 스포츠 채널인 ESPN을 계열사로 확보했고 디즈니는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 마이클 아이스너와 잭 웰치의 차이점은?

아이스너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뛰어난 재무적 성과를 거둔 CEO였다. 흔히 ‘20세기 최고의 경영자’라고 칭송받는 잭 웰치 전 GE 회장과 비교해도 그가 거둔 성과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아이스너와 웰치 모두 만 20년 동안 각각 한 기업의 CEO로서 회사를 이끌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은퇴에 대한 반응도 극과 극이었다.

 

웰치는 4억2000만 달러(약 4800억 원)에 달하는 은퇴 패키지(퇴직금, 자문료 외 고급아파트, 전용기 등 각종 특전)를 GE로부터 받으며 화려한 퇴임을 맞이했다. 반면 아이스너의 경우, 2004년 월트 디즈니의 아들인 로이 디즈니가 중심이 돼 벌인 아이스너 퇴진 운동으로 43%의 주주들이 불신임 투표를 단행했고, 결국 이사회 의장에서 쫓겨나는 사상 초유의 굴욕을 경험하며 쓸쓸히 사라졌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아이스너의 몰락은 자기중심적이고 나르시시즘에 가득 찬 그의 성격이 오랜 기간의 성공과 결합돼 초래됐다. 디즈니를 위기에서 구해낸 아이스너는 점점 회사의 모든 일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CEO로 변해갔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아이스너 제왕(Emperor Eisner)”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스너는 2000년대 들어 수많은 중역들을 몰아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제거해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스너는 무려 10년 동안 절대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결국 로이 디즈니를 비롯한 대주주들의 집단행동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반면 웰치는 자신이 물러날 시점을 미리 정해 놓았다. 또 가장 뛰어난 후계자를 양성하는 등 자신의 ‘레거시(legacy·유산)’를 조직에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65세가 되는 해에 회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고 후계자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주주들에게 약속한 대로 2001년 9월 7일 회사를 떠났다. 결국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제대로 물러나기’에 있었다.

 

○ 제대로 물러나기가 힘든 이유

권력에 대한 집착과 미련은 물러날 때를 놓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아무리 겸손하고 훌륭한 인격을 지닌 리더라 할지라도 자리와 이에 수반된 권력을 일단 경험하게 되면 스스로 물러날 때를 정해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특히 그 리더가 힘을 부하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혼자 쥐고 있는 스타일이거나 조직의 특성상 힘이 리더에게 몰리는 경향이 있다면 스스로 물러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우월 의식 역시 문제다. 간혹 “물러나고 싶어도 내가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안 돌아가고 금방 망해버릴 것 같다”며 자리에서 내려오길 주저하는 CEO들이 있다.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 회사엔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능력이라곤 없는 B급, C급 임직원들만 모여 있다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실제로는 조직원들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CEO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문제인 경우가 많다. 이런 조직일수록 ‘은퇴’나 ‘후계자 육성’과 같은 단어는 금기처럼 여겨진다.

 

○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은 제대로 물러나기에 달려 있다

자신이 물러난 후에도 그 조직이나 부서가 지속적으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제대로 물러난다는 건 단순히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니다. 자신을 대신해 새로운 시각을 바탕으로 조직이나 부서를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후계자를 키우고, 가장 적절한 시점에 권한을 인계한 후 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리더가 재임 중 위대한 성과를 내다가 제대로 물러나지 못해서 실패한 리더로 전락하고 만다.

 

리더십은 레거시를 남기는 작업이다. 자리에 연연해 차일피일 미루다 타인에 의해 물러난 리더의 말로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반면 잭 웰치처럼 위대한 리더들은 모두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었다. 위기에 빠진 제록스를 구원한 앤 멀케이 역시 대표적 예다. 2001년 8월 제록스 CEO에 오른 멀케이는 주가가 4달러까지 추락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동시에 기존 복사기 비즈니스 모델을 과감히 청산하고 정보기술(IT)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는 서비스 회사로의 변신을 꾀했다. 그 덕에 2008년 미국 언론은 멀케이를 최고의 CEO로 평가했다. 그러나 멀케이는 CEO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2009년 5월 자신의 후계자로 우르술라 번스를 지명하고 깨끗하게 물러났다.

 

새 정부 출범 후 많은 공기업의 기관장과 금융조직의 CEO가 교체됐다. 정권이 바뀌거나 경영환경이 바뀔 때 조직을 이끌었던 리더가 함께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과정이나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갑자기 바뀌는 사례가 많아 안타깝다. 제대로 물러날 수 있는 리더들의 자세와 준비, 그리고 이들이 품위 있게 다음 여정을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화가 한국의 많은 조직에 좀 더 잘 정착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동일 연세대 경영대 교수

정리=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